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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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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6(2017)년 1월 11일 [기사]

 

《예언자》-황진

 

세종시기의 명재상으로 알려졌던 령의정 황희의 5대손인 황진은 자를 명보라고 불렀는데 장수 황씨출신이다.

황진은 사람됨이 매우 엄격하고 대가 세고 힘이 센것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황진의 인상특징은 수염이 무척 길고 위풍이 당당한것데 그를 대하는 사람마다 중국 삼국시기의 맹장 관우에 비겨 미염공(수염이 아름다운 사나이―관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기로 소문난 그는 장차 이름난 장수가 될 꿈을 안고 꾸준히 무술을 닦아 소년시기에 벌써 장사로 이름났었다.

황진은 1576년 애젊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이 되였고 1590년에는 통신사일행을 호위하는 군관으로 일본에 따라간적이 있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황진은 가지고 간 로자를 몽땅 털어 좋은검을 두개 사왔다고 한다.

그의 동료들이 칼을 들고 귀국한 황진에게 영문을 물을 때면 《오래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것인데 내 장차 이 검을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하네.》라고 말해주군 하였다.

그들의 귀국후 조정에서는 왜놈들이 전쟁을 일으킬것인가 안일으킬것인가 하는 론의가 분분하였는데 부사로 따라갔던 김성일이만은 감히 왜놈들이 쳐들어오지 못할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부패무능한 조정의 사대부들은 김성일의 호언장담에 귀를 기울이며 아무런 방비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이것을 알게 된 황진은 대노하여 이렇게 소리치며 나섰다.

《쥐새끼같은 놈의 말한마디에 어찌 조정대사를 결정하겠는가. 내 반드시 성일의 목을 베여 후날을 징계하겠다.》

황진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고 김성일을 죽이려 들자 급해맞은 동료들이 그를 붙잡고 극력 말렸다.

황진은 닥쳐올 전쟁에 대처하여 삼남(충청, 경상, 전라도)의 주요 길목의 하나인 동복현의 현감으로 배치하여줄것을 요청하여 임지로 부임되여 가게 되였다.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향하면서 황진은 동료들과 대신들에게 왜놈들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것이니 만전지책을 강구해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무능하기 짝이 없는 량반사대부들은 그 누구도 그의 당부에 귀를 귀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동복현감으로 부임된 황진은 부임 첫날부터 투구, 갑옷을 엄제하고 밤낮이 따로 없이 훈련을 진행하며 수하군사들을 조련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듬해 4월, 드디여 왜놈들이 20여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불의에 쳐들어왔다.

당시 왜놈들은 100여년간의 전란에서 단련된 정예병들이였고 우리 군사들은 이름은 비록 군사라하지만 대개가 칼 한번 잡아보지 못한 농사군들인지라 가는 곳마다 대패하여 순식간에 수십개의 고을이 함락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황진은 곧 전라감사가 이끄는 방어군에 고을군사들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전장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악착하기 그지없는 왜놈들과의 대전에서 전라감사가 이끄는 방어군은 지휘의 무능성으로 하여 여지없이 패하고말았다.

싸움에서 패한 여러 고을의 군사들은 풍지박산이 되여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헤쳐졌지만 유독 평소에 군사조련을 꾸준히 하였던 황진의 군사들만이 무사히 돌아올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황진은 무너진 진을 자기 군사들과 함께 한몸으로 막아나서서 적의 질풍같은 공격을 견제하였으며 안덕원에서 직접 적장을 쏘아죽이고 전군의 괴멸을 막아낼수 있었다.

그후 황진은 라주목사 권률의 지시로 웅령과 리치현방어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발휘하여 수많은 적을 잡았다.

그때 왜놈들은 조선에서 세번 큰 싸움을 치르었는데 웅령과 리치현싸움이 제일 컸다고 하였다.

이 웅령, 리치현싸움에서 전라도로 쳐들어가던 고바야가와의 대군이 거의 절반이나 황천객이 되여버렸으며 황진은 이 싸움을 계기로 적진에까지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게 되였던것이다.

조정에서는 그의 이러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훈련원 판관(정5품벼슬)으로 임명하였다.

그 이후에도 황진은 싸움마다에 솔선 앞장에 서서 수많은 적을 잡아 대공을 세웠고 또 절도사 신거이를 따라 북상하여 수원을 회복하는 싸움에서도 또다시 명성을 떨치였다.

황진의 특기는 순식간에 여러대의 화살을 연거퍼 날리는것이였다.

이러한 그의 재간이 벌써 왜놈들속에 널리 알려져 황진이 나타났다고 하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는 놈들이 많았다.

1593년 봄 조선군사들이 력량을 재편성하여 전 전선에 걸쳐 반공격을 시작하자 황진도 충청병마사로 임명받고 적을 뒤쫓으며 상주에까지 쳐들어가 련전련승하는 대공을 세웠다.

그해 7월에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조정의 령을 받고 창의사 김천일, 절도사 최경희 등과 함께 진주로 들어가 항전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진주성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여 곧 적의 대군이 산과 들을 가득 채우며 쳐들어왔다.

원래 황진 등이 진주성을 사수하려 들어올 때 조정에서는 명나라 지원병과 함께 각지의 의병대들이 외부에서 지원을 벌려 안팎에서 적들을 크게 포위섬멸하자는 약조가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군사들은 적의 흉맹한 기세에 겁을 먹고 끝내 진주성으로 진격하지 않아 황진 등은 고립된 성에서 결사적으로 항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성안에서는 불과 수천명이 응전하였으나 성밖 왜놈들은 10여만을 헤아렸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서도 황진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조선의 장수답게 굴하지 않고 여러날동안 결사항전을 벌려 이루헤아릴수 없는 적을 족치였다.

왜놈들은 어떻게 하나 고립된 진주성을 함락해보려고 저들의 시체로 사다리를 쌓으면서 악착하게 덤벼들었다.

황진은 성을 돌면서 군사들을 고무하며 싸웠는데 그가 직접 활로 잡은 왜놈의 수만도 무려 수백놈에 달하였다.

왜놈들이 해자를 메우고 흙산을 쌓고 덤벼들면 성안에서도 마주 성벽을 높이며 항전하였고 다락을 세우고 거기에 틀고앉아 적들이 성안에 대고 조총을 쏘아댈 때도 마주 불질하여 모조리 태워버렸다.

왜놈들은 여러개의 부대로 나누어 밤낮이 따로 없이 엇바꾸어가며 련이어 덤벼들었지만 우리 군사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싸워야만 하였다.

큰 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지고 활시위가 늦추어지는 등 온갖 불리한 조건에서도 황진은 굴하지 않고 제손으로 직접 흙과 돌을 날라 무너진 성벽을 구축하고 무기를 손질하는 등 군사들을 고무하였다.

아흐레동안 벌어진 치렬한 공방전에서 죽어너부러진 왜놈의 수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는데 특히 마지막날에 황진의 화살에 맞아 죽은 놈만도 100여명이 넘었다.

적들이 수많은 시체를 남겨놓고 혼비백산하여 물러가버리자 황진은 성루에서 웃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동쪽성은 비교적 다른데보다는 성벽이 훨씬 높았는데 죽은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성벽의 절반을 넘어서고있었다.

《참 많이도 뒈졌군. 오늘 잡은 왜놈의 시체가 해자를 메웠으니 천은 될것이다.》

황진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물러서려는데 갑자기 한방의 야무진 총소리가 대기를 째며 울렸다.

순간 적의 흉탄에 가슴을 맞은 황진은 흠칫 몸을 떨며 비틀거렸다.

뒤늦게 부하들이 달려왔지만 황진은 죽어서도 진주성의 성벽이 되려는듯 성돌을 억세게 그러안은채 운명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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