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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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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6(2017)년 10월 8일 [기사]

 

《을미사변》

 

명성황후살해사건(《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침략자들이 조선왕궁을 습격하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살해한 사건으로서 조선의 자주권과 우리 민족의 존엄을 침해한 일본의 국가테로범죄행위이다.

사건이 있은 해가 을미년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당시 조선에서는 자본주의렬강들의 세력권쟁탈전이 매우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었다.

청나라를 등에 없고 정권을 유지해오던 국왕과 명성황후일파는 청나라가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패하고 조선에서 밀려나자 이번에는 저들의 안전과 향락을 유지하려고 타산한데로부터 친로적경향으로 나갔다.

이렇게 되자 우리 나라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획책하던 일본침략자들은 친일세력을 강화하며 조선침략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그 출로를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로세력을 제거하는데서 찾았다.

그 귀결이 바로 명성황후암살음모였다.

사실 일본침략자들의 명성황후에 대한 암살음모는 10월이전에 벌써 있었다.

조선주재 일본공사 이노우에 등은 일본을 배척하는데 앞장선 명성황후와 정계에서 명성황후에게 몰리우고있던 친일파 박영효사이의 대립관계를 리용하여 모략사건을 꾸미였다. 그러나 명성황후암살모략은 사전에 발각되여 실패하였고 모든 혐의가 박영효에게 돌려지자 국왕은 1895년 7월초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였다. 명성황후암살미수사건은 당시 일본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저들의 대조선침략정책이 전면적으로 파탄될수 있는 긴박한 사태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이번에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친로파세력의 우두머리인 실권자 명성황후를 제거할 흉계를 꾸미였다.

명성황후학살사건은 바로 조선을 기어이 독점적식민지로 타고앉으려는 이와 같은 흉계로부터 감행된 참변이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살해계획은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지시밑에 보다 적극적으로 계획되고 감행되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을미사변인것이다.

1895년 6월 일본정부는 내각회의후 명성황후암살작전의 적임자로 포악하고 흉악한 군벌출신인 륙군중장 미우라 고로를 내세우고 그를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명성황후암살계획실행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미우라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첫째로, 조선주둔 일본군수비대와 령사경찰 등 총무력 약 700명을 왕궁습격에 동원할수 있다는 사전승인과 리용권이며 둘째로, 일본정부에서 조선에 와있는 일본민간인깡패들에게 줄 기밀자금지출과 그 사용권이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놈은 일본군사깡패들을 총동원하여 왕궁을 포위습격하였다. 사다리를 놓고 은밀히 성벽을 넘어 왕궁안에 기여든 놈들은 왕궁을 지키던 시위대 련대장 홍계훈을 무참히 학살하고 거침없이 국왕과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을 포위점령하였다.

놈들은 그곳에 있는 국왕과 왕세자를 구석에 연금해놓고 명성황후를 색출하기 위해 피에 주린 이리떼마냥 돌아쳤다. 살인악당들은 이미 사진을 통해 명성황후의 얼굴을 눈에 익혔지만 숱한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피난하는 혼잡속에서 그를 쉽게 찾을수 없었으므로 맞다드는 궁녀들을 닥치는대로 칼로 찔러죽이였다.

삽시에 왕궁은 일대 살륙장으로 변하였다. 그런속에서 야수들은 일본인 고무라가 명성황후의 양딸로 미리 박아넣었던 년의 입을 통해 일본군경의 칼에 맞아 쓰러진 한 녀인이 명성황후라는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으며 저들의 범죄행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아직 숨이 지지 않은 명성황후를 장작더미우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죽이고 타다 남은 뼈들을 련못에 버리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살해는 당시 왕권에 의하여 대표되던 조선봉건왕조국가주권에 대한 란폭한 유린이였으며 세계력사상 류례없는 잔인한 학살만행이였다.

력사적사실은 을미사변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의 산물이며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조정밑에 감행된 반인륜적인 특대형 국가테로범죄라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고있다.

이 사건은 삽시에 내외여론을 분노로 끓어번지게 하였으며 그로 하여 일본침략자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더욱더 높아졌다. 이렇게 되자 일본정부는 미우라이하 40여명을 본국에 끌어가 형식상 재판놀음을 벌리다가 《증거불명》이라는 구실밑에 모두 무죄석방하였다.

을미사변은 일제야말로 조선민족과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철천지원쑤, 포악하고 야수적인 침략자무리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으며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그 모든 죄악을 반드시 천백배로 결산하여야 한다는 력사적과제를 후대들에게 다시금 깊이 새겨주고있다.

리 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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