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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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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1월 9일 [련재]

 

3. 태양의 해발

 

불가능에 대한 생각

 

 

1946년의 어느날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댁에서 갓 시집온 한 항일투사의 안해와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문득 해방전 도천리에서 구장을 하던 정동철이라는 사람의 행처를 알게 되시였다.

그는 항일대전의 나날 녀사께서 도천리에서 지하공작활동을 벌리시던 시기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였다.

그가 살아있다는것을 아시게 된 녀사께서는 선뜻 믿기 어려우신듯 한동안이나 그를 바라보시다가 크나큰 기쁨에 넘쳐 《정동철이 살아있다니 됐어요.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예요.》라고 말씀하시였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격정으로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녀사께서는 잠시후 자신께서 도천리에서 지하공작을 하실 때 정동철과 련계를 맺고 활동하시던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녀사와 정동철《구장》과의 감격적인 상봉이 벌어지게 되였다.

그해 겨울 평양에서는 전국사법일군회의가 진행되였는데 어느 한 군에서 사법일군으로 사업하던 정동철《구장》도 참가하였다.

이것을 알게 되신 녀사께서는 한 일군에게 그를 곧 데려오도록 하시였다.

회의휴식시간에 주석단마이크를 통하여 자기를 찾자 《구장》은 영문을 모른채 기다리는 일군을 따라 대기하고있던 승용차에 오르게 되였다.

승용차가 한 저택 앞마당에 이르자 일군은 그에게 어서 들어가자고 하였다.

이때 현관문으로 수수한 옷차림을 하신 젊은 녀인 한분이 나오더니 들어오는 손님을 유심히 지켜보시다가 달려나오시였다.

그 순간 《구장》의 눈이 번쩍 뜨이였다.

《옥순이!》

그는 마주 달려갔다.

《동철오빠! 이게 몇해만이예요.》

《10년이구나. 옥순이, 해방이 좋긴 좋구나.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니 내가 살아서 옥순이를 다시 만났구만. 그래 지금도 장군님슬하에서 일하겠지?》

《구장》은 도천리시절이 되살아나 아무 간격없이 그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녀사께서는 그러는 그를 이끄시여 방안으로 안내하시였다.

그제야 《구장》은 자기를 용케 찾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내가 여기에 오게 되였는가고 함께 온 일군에게 묻게 되였다.

그를 통하여 비로소 모든것을 알게 된 《구장》은 밝게 웃고계시는 녀사를 향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내 이게 무슨 실수입니까.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예?!》

녀사께서는 다정하신 웃음으로 말씀하시였다.

《오빠, 왜 이러세요? 어서 일어나 살아온 이야기나 해주세요.》

녀사께서는 그날 10년전 도천리에서처럼 정동철《구장》을 오빠라고 친근하게 불러주시며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였다.

《구장》은 녀사께 《류영찬이네 돼지막앞에서 헤여질 때 언제 다시 만날지 생사를 기약할수 없어서 제가 걱정하니 옥순동지는 말씀하셨지요. <저 백두산쪽에서 총소리가 나면 이 옥순이도 거기서 잘 싸우는줄 아세요.>하고.

그 말씀이 지금도 이 귀전에 생생한데 그 유격대공작원이 오늘은 우리 김일성장군님의 부인이시라니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하며 끓어오르는 흥분을 좀처럼 감추지 못하며 한 말을 하고 또 하였다.

녀사께서는 그러는 그에게 《저는 오늘 정말 기쁩니다.…오빠의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는 만날 날만 기다렸어요. 오빠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그러자 그는 《아닙니다. 제가 무슨… 그때 옥순동지가 하두 대담하시고 지혜있었으니 저도 성공한것이지요.》하며 다시금 그때의 일들을 꺼냈다.

그날 그는 마음속으로 늘 옥순동지를 만나뵈웠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먼저 녀사께서 자기를 찾아주셨다고 하면서 감격과 고마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적들에게 체포되였을 때 죽을고비에서 구원해준 정구장을 어찌 잊을수 있는가고 하시며 장군님께서도 정동철동지가 오면 우리 집에서 며칠 푹 쉬다가 가게 하라고 하셨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

해외동포사업국의 일군으로부터 이런 사실과 함께 나는 녀사께서 유능한 지하정치공작원이시였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녀사께서 지니신 놀라운 대담성과 비상한 예지의 기저에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임무를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이 놓여있었다.

적후공작이란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어려운 사업인가. 시시각각으로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마음의 탕개를 풀 순간의 여유도 없는 긴장한 시간의 련속이다. 누구의 도움도 쉽게 받을수 없고 예견치 않았던 정황들도 독자적으로 판단결심해야 한다.

걸음걸음 시련과 난관이 겹쌓이는 이런 지하공작임무도 녀사께서는 훌륭히 수행하시였으니 그 비결은 무엇이였는가.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임무는 지상의 과업이며 그 길에서는 한걸음도 물러설수 없다는 그것이였다.

1937년 3월, 장백을 떠나 무송지구로 진출하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서강부근에 이르게 되였을 때 장군님께서는 녀사께 적통치구역인 장백현 하강구와 국내의 신파지구에 혁명조직들을 튼튼히 꾸리고 넓은 지역에 확대할데 대한 실로 중대한 임무를 주시였다.

지도를 펼쳐보면 이 지구는 국내에 혁명조직들을 확대발전시키는데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다시말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조직들과의 련계를 제때에 보장할수 있게 할뿐아니라 선진로동계급이 집결되여있는 함흥지구를 비롯한 북부조선공업지대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놓여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녀사께 우선 도천리에 나가 합법적활동을 할수 있는 사업토대를 준비한 다음 국내 신파지구와 장백현 하강구일대에서 조국광복회조직을 적극 확대하면서 우수한 로농청년들을 반일청년동맹에 묶어세우는 사업을 벌릴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그곳의 지형과 실정, 공작임무의 중요성과 수행방도들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나는 동무를 믿기에 이처럼 어려운 임무를 맡긴다고 하시며 믿음에 넘친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녀사께서는 그 크나큰 기대와 믿음에 보답할 결의를 담아 이렇게 말씀을 올리시였다.

《사령관동지, 기어이 임무를 수행하고 부대로 돌아오겠습니다.》

도천리는 국내의 신파대안인 13도구부락에서 30리가량 떨어져있는 200여호나 되는 비교적 큰 산간마을이였다.

도천리란 마을어귀의 개울복판에 복숭아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불리우게 된 이름이였다.

자주색저고리에 곤색세루치마, 목이 긴 버선의 《무산집새애기》가 도천리에 나타났다.

《엄옥순》이라는 이름의 그 녀성은 무산에서 살다가 살길을 찾아오는 이주민가족이라 하였다.

행장을 풀고 마을에 자리를 잡자 부지런하고 인정많은 이웃이 되여 마을사람들과 친근하게 사귀며 동네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나서는 그 녀인이 바로 능숙한 지하공작원 김정숙녀사이시였다.

녀사께서는 사람들을 그저 지나치는적이란 없으시였다.

매돌질을 하는것을 보시면 마주앉으시여 매돌을 돌려주시고 방아를 찧는것을 보시면 함께 방아를 밟아주시였으며 부뚜막을 고치는것을 보시면 서슴없이 흙손을 드시였다. 나무도 패주고 물도 길어주시였다. 밭일이 바빠 애어머니들이 어린애를 돌볼 겨를이 없으면 아이들을 업어주고 안아도 주시면서 한참동안이나 돌보시였다. 밤마다 우물가에 나가 물동이를 이고 걷는 법도 숙달하시였으며 어느 민속명절을 앞두고는 여러날 밤을 패며 그네뛰는 련습도 하시여 사람들과 더욱 친숙해지셨다.

하여 녀사께서는 한주일동안에 마을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도 다 기억하게 되시였다.

마을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녀사의 정성은 참으로 돌우에 꽃이라도 피울수 있으리만큼 지극하였다.

한번은 악착한 지주가 열병에 걸린 부엌데기소녀를 산중초막에 내버린 일이 있었다.

아무도 그 불쌍한 소녀를 돌봐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 사연을 알게 되신 녀사께서는 주저없이 그 초막에 찾아가시여 소녀와 침식을 함께 하며 병구완을 해주시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지하조직성원들이 초막으로 모여들었다.

살릴 가망도 없는 아이 하나때문에 위험천만한 모험을 하다가 감염되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사령부로부터 받은 임무는 어찌하며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돌봐주더라도 침식을 같이하는것만은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였다.

그때 녀사께서는 말씀하시였다.

《걱정말고 돌아가세요. 목숨이 두렵다고 아이 하나 살려 못 낸다면 나라는 어떻게 찾고 인민은 어떻게 구원해내겠어요? 인민을 살리자고 내댄 목숨인데 두려울것이 없어요.》

녀사께서는 그 불쌍한 처녀를 끝내 살려내시였다.

마을사람들은 약이 병을 고친것이 아니라 천사같은 녀사의 그 사랑이 불사약이 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 나날에 녀사는 자기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딸로, 언니로, 누이로 되시였다.

녀사께서는 인민들 누구나를 공작대상이 아니라 정든 이웃을 대하듯이 살뜰하게 대하시였다.

그 나날 녀사께서는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셨으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역경의 순간인들 또 얼마나 많이 넘기셨으랴, 지새운 밤은 그 얼마이고.

하지만 녀사께서는 맥을 놓으실수 없으셨다. 순간도 휴식을 모르시였다.

옛 글에 이르기를 큰뜻 품은 사람의 땀방울은 석벽을 녹인다고 했다.

그러나 녀사께서 기울이신 노력은 강철도 녹이는것이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누구나 녀사를 얼굴도 곱지만 마음도 비단결같다고 하면서 정다운 혈육을 만난듯 그분을 가리켜 《우리 옥순이》라고 정을 담아 불렀다.

녀사께서는 사람들을 교양하고 묶어세울수 있는 모든 기회, 모든 계기를 다 리용하시였다.

그들에게 조국해방의 새 봄볕을 안겨주기 위하여 마을청년들과 녀인들, 로인들과 소년들이 있는 화전의 뙈기밭과 야학방에서, 방아간과 빨래터에서 낮과 밤을 보내시였다.

그리고 이들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고 새로운 투쟁조직들을 내오기 위해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시였으며 그들에게 지하공작방법을 가르쳐주시고 실천투쟁속에서 단련해나가도록 세심히 이끌어주시였다.

녀사의 이와 같은 헌신적인 노력과 인내성있는 교양에 의해 얼마후 도천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들에는 혁명적으로 준비되고 단련된 핵심들이 꾸려지게 되였고 마침내는 그들을 중심으로 반일청년동맹, 도천리부녀회, 반일소년회, 반일로인회, 반군사조직인 생산유격대까지 조직되였다.

많은 남녀로소들이 조국광복회 산하조직을 비롯한 혁명조직들에 망라되였으며 하여 도천리는 혁명촌으로 일신되였다.

원군운동의 최고형태는 참군이다.

혁명조직들을 통하여 장악한 핵심들중에서 파악있는 청년들이 선발되여 인민혁명군에 참군하는 사업도 힘있게 벌어졌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적들의 폭압공세에 눌리워 기를 펴지 못하던 도천리가 마치 강력한 발동기를 가진 자동차나 여러필의 청동마를 메운 마차와도 같이 기세충천하여 돌진하였다.

나는 생각했다.

녀사의 그 노력이 조국해방의 날을 갈망하던 사람들을 장군님의 품으로 모이게 하였고 원쑤들을 무서워하던 이들을 불굴의 투사들로 만들었으며 혁명을 외면하던 사람들을 혁명의 적극적인 동반자, 지지자로 키워낸것이 아닌가.

혁명조직들과 혁명군중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녀사께서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백두산의 하늘가를 바라보시며 사령부를 떠나올 때 다지셨던, 기어이 임무를 수행하고 부대로 돌아오겠다시던 결의를 다시금 가다듬으시였다.

이런 불타는 결의를 안고 녀사께서는 혁명조직들이 한결같이 생기에 넘쳐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끼니도 휴식도 잊으시고 사나운 비바람도, 찌는듯 한 무더위도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걷고 또 걸으시였다.

《동무들! 김일성장군님은 우리모두의 태양이십니다. 우리모두는 김일성장군님의 해발이 됩시다.》

녀사께서 가시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새겨주신 말씀이다.

녀사께서는 도천리와 함께 신파(오늘의 김정숙군 김정숙읍)지구의 혁명화와 강력한 지하조직망을 형성할데 대한 명령도 빛나게 수행하시였다.

신파는 도천리에서 30리정도 떨어져있고 민가는 1 000여호나 되는 국경지대의 상업중심지인 동시에 일제의 국경경비망의 요충지로서 경비가 여간 심하지 않았고 폭압소동도 그칠새 없었다.

그만큼 녀사께서 맡으신 임무수행은 매우 어려운것이였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주저하지 않으셨다.

녀사께서는 기층지하조직을 튼튼히 꾸리는 한편 광범한 인민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하여 강안동분회, 삼광구분회를 비롯한 여러개의 조국광복회 분회를 새로 조직하시였다.

여기에는 조국광복회 특수분회까지 있었다.

또한 유격대원호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였다.

당시 일제는 한되박의 쌀과 한홉의 소금, 한자의 천이라도 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를 강화하고있었다.

그러나 녀사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군복용천과 신발, 소금과 총기름으로 쓸 머리기름, 학습장과 등사원지, 등사잉크 등에 대한 물자확보사업은 힘있게 추진되였으며 하여 그것들은 빨찌산들의 전투기재가 되고 마음의 량식이 되여 조국을 짓밟는 원쑤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녀사께서는 이와 함께 항일빨찌산부대의 활동에 필요한 군사정보들을 수시로 수집하여 사령부에 보내는 사업도 적극적으로 벌리시였다.

녀사께서 몸소 하루에도 몇차례씩 사선을 넘나들며 알아내신 적의 병력과 무장장비, 배치상태 등은 즉시 사령부에 보고되였다.

특히 1937년 6월 보천보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가 그 참패를 만회해보려고 날뛰면서 유격대를 《토벌》하려고 신파를 거쳐 간삼봉방면으로 기동하는 부대들의 기동행로와 병력수, 압록강 도강날자까지 알아내시여 제때에 사령부에 보고함으로써 간삼봉전투의 빛나는 승리에도 크게 기여하시였다.

그러던 1937년 8월 초순의 어느날, 눈부신 지하공작활동을 벌려가시던 녀사께서는 악질적인 정안군놈들에게 체포되시였다.

놈들이 녀사께서 거처하시던 집의 헛간에 감추어진 원호물자들인 종이퉁구리와 등사원지, 기름 등을 발견했던것이다.

도천리는 순간에 비애에 잠겼다. 남녀로소모두가 녀사께서 체포되시였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렸던것이다.

친딸, 친누나와 언니, 친동생같던 녀사께서 안계시니 마을에는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고 생기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울고만 있지 않았다. 녀사의 석방운동에 너도나도 떨쳐나섰다.

적들은 녀사의 불굴의 의지를 어보려고 미쳐날뛰였지만 그 어떤 야수적인 고문과 기만술책으로도 어쩔수 없었다.

나중에는 죽음으로 녀사를 위협하였다.

생의 마지막시각이 한치한치 다가오던 어느날 밤 녀사께서는 채 끝맺지 못한 혁명임무를 하나하나 돌이켜보셨다.

한 일보다 못한 일이 더 많게 생각되셨고 해야 할 일을 마저 수행할 기회가 더는 차례지지 않게 된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시였다.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철저히 수행못하고 중도에 가는것이 가슴미여지게 슬프시였다.

또한 녀사께서는 해방된 조국땅을 보고싶으시였다. 일가친척들을 찾아보고 장군님을 모시고 싸운 유격투쟁에 대한 가지가지의 이야기들도 밤새워 후대들에게 들려주고싶으시였다.

그러나 령어의 몸이 되였으니 자신의 가슴속에 차넘치는 소원을 푸는 길은 마지막생명을 바쳐 혁명의 사령부를 보위하고 전사의 영예를 고수하며 못다한 혁명임무를 동지들이 마저 수행하도록 고무해주는 그 길뿐이라고 결심하시였다.

그 비장한 각오를 녀사께서는 조직에 보내는 마지막편지에 담으시였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죽을것입니다. 그러나 조직은 살것입니다. 나의 재산의 전부인 2원을 보냅니다. 조직의 자금으로 써주십시오.》

도천리의 혁명조직성원들은 연필로 씌여진 길지 않은 녀사의 그 편지에서 너무나 큰것을 받아안았다.

조직과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최후를 각오하신 녀사의 백절불굴의 정신과 함께 자신께서 못다하신 임무를 혁명조직에서 끝까지 수행하기를 바라시는 절절한 당부와 념원, 모든것을 혁명에 깡그리 바치시려는 무한한 헌신성과 열렬한 혁명열…

그럴수록 그들은 장군님께서 파견해주신 유능한 지하공작원, 자기들의 심장마다에 혁명의 참뜻을 새겨주고 조국해방의 밝은 서광을 안겨준 위대한 혁명가, 뜨거운 사랑을 끝없이 안겨준 친혈육같으신분께서 당하는 고통과 위험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도천리의 조직원들은 집단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아무런 죄도 없는 량민을 불법체포한데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즉시 석방을 요구하였다.

녀사를 감금하고있던 13도구경찰서의 서장은 마지못해 500명이 서명하는 량민보증서를 작성해오면 량민으로 인정하고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였다.

사실 이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오라는것만치나 실행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허나 얼마후 500명이 보증한 증서가 경찰서장의 책상우에 놓여졌다.

그자는 눈알이 튀여나올 지경으로 놀랐다. 량민보증서를 받아오면 석방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실행될수 없을것이라고 장담하고있었기때문이였던것이다.

《역적》이나 《공비》로 지목된 《불온분자》를 《량민》으로 인정하는 보증서에는 아무나 함부로 손지장을 누르려 하지 않는것이 그 당시의 보편적인 대중심리였다.

그런데 500명의 도장과 지장이 주런히 찍혀있는 량민보증서가 자기앞에 놓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이런 사실을 들으며 나는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실로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겨날수 있었는가?

200여호밖에 안되는 도천리마을에 그렇게 많은 지하조직원이 있었을수도 없다. 또 아무리 조직이 발동되였다 해도 조직원의 수보다 몇배나 더 많은 그 숱한 사람들이 모두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보증서에 함부로 도장을 누를수는 없었을것이다.

과연 어떻게 되여 500명의 사람들이 서슴없이 량민보증서에 도장을 누르게 될수 있었겠는가.

녀사께서 수천만자루의 품과 정을 기울여 이끌어주신 혁명조직들과 각성된 군중들, 인민들의 다함없는 사랑과 지지에 의해서였다. 다시말하여 강권이나 금권으로도 살수 없는 인민의 절대적신뢰와 지지가 그런 기적을 낳게 한것이 아니였겠는가.

진정 녀사께서는 받은 명령지시를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조건속에서도 불가능을 모르고 철저히 수행하신 주석님의 참된 동지, 혁명에 무한히 충직한 녀성투사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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