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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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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0월 21일 [련재]

 

3. 태양의 해발

고향길

 

언제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타국의 외진 섬에서 해종일 망망한 바다만을 바라보며 살던 어느 한 나라의 등대지기가 고국의 신문 한장을 우연히 얻게 되였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사무치게 그립던 고국의 숨결인양 그것을 보고 또 보던 그는 그날 날이 저무는것도, 등대에 불을 켜는것도 잊어버렸다.

그바람에 지나가던 배들이 암초에 걸려 파손되고 등대지기는 죄인으로 타국의 법정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였다는 눈물겨운 이야기이다.

사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란 따져놓고보면 무엇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것은 아마도 고향이란 그 어떤 혜택을 입어서가 아니라 자기를 낳아 키워준 부모들의 넋이 깃들어있고 자기의 태를 묻은, 자기 몸의 한 부분과도 같은 소중한 곳이여서 한생토록 뇌리에 소중히 간직되여있고 애틋한 련민의 정을 끝없이 불러일으키기때문일것이다.

김정숙녀사의 고향은 회령이다.

회령!

이렇게 조용히 불러보면 녀사의 봄날같은 따뜻한 미소가 어려오고 백살구꽃의 향기가 페부로 스며드는것만 같다.

몇해전 10월, 조국을 방문했던 나는 일정이 긴장한 속에서도 시간을 내여 녀사께서 탄생하신 회령땅을 찾았다.

청명한 가을날씨에 소슬바람이 불었다. 참으로 오래전부터 녀사에 대한 경모의 정을 안고 그토록 와보고싶던 오산덕에 나는 올랐다. 상상속에 그려보고 또 그려보던 곳이였다.

단풍이 물드는 10월이건만 백살구나무숲을 이룬 오산덕엔 한여름의 록양인양 푸른 잎새들이 우수수 바람에 설레며 나를 정답게 반기는듯싶었다.

해설을 맡은 중년의 녀성강사는 회령에 대한 크나큰 긍지를 안고있었다.

그것은 그가 첫 이야기를 《회령3미》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펼친것을 두고서도 잘 알수 있었다.

회령이라고 하면 예로부터 녀미, 행미, 토미로 일컽는 3미로 유명한 고장이라고 한다.

회령을 다녀간 중국의 옛 사신이 《조선의 미목수려한 미녀들이 여기에 다 모인듯 하구나.》 하고 말하며 넋을 잃었다는 녀성들의 아름다운 용모에 타고장의 성미거친 녀인들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는 선량한 마음씨와 깊은 의리심, 근면하고 알뜰하고 이악한 생활력과 강인하고 대바른 성품으로 특징지어지는 회령규슈라고 하면 멀리 남쪽에서 사는 사람들까지도 선 안 보고 혼인을 서둘렀다는 회령녀미.

그런가 하면 노란 탁구공같이 통통하게 살진 새큼달달한 회령백살구는 한번 입에 넣으면 먹는 사람의 혀까지 말려들어 갈 정도로 기막히게 진미를 돋구는데다가 암과 로화방지에 특효가 있는 신비의 열매여서 꼽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는 회령행미.

그 아름다움으로 세인의 눈길을 끄는 우리 나라 백자기의 주원료인 회령백토와 모양새가 우아하고 색갈이 독특하며 가벼우면서도 잘 깨지지 않고 음식을 담으면 쉽게 변질되지도 않으며 토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여 오랜 세월 왕궁에서 사용했다는 회령오지를 통털어 이르는 회령토미.

강사녀성은 이 《회령3미》에다가 라운규와 같은 민족영화의 개척자, 선구자, 조기천과 같은 유명한 시재가 다름아닌 회령출신이라는 사실까지 곁들면서 자기 고향에 대한 자랑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던 그는 《그러나 우리 회령사람들의 자랑중의 진짜자랑, 제일자랑은 이 고장이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고향이라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손길을 녀사의 고향집에로 가리켰다.

나는 가난의 흔적이 너무도 짙게 어려있는 한 농가앞에 이르렀다.

녀사의 일가분들이 사시던 본채에 붙어있는 작은 곁방이 나의 눈에 아프게 안겨왔다.

어린시절 녀사의 손길이 끝없이 닿았을 문고리, 녀사의 작은 발자욱이 수없이 찍혀졌을 토방과 작은 마당…

추녀낮은 이 집이 바로 녀사께서 탄생하시고 어린시절을 보내신 유서깊은 고향집이였다.

조국인민들은 누구나 이 집을 《회령고향집》이라고 부르며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있었다.

《김정숙어머님의 고향이라는 가슴뿌듯한 긍지와 함께 저희들은 어머님을 유년시절의 다섯해밖에 모시지 못한 한스러움도 간직하고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강사는 나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들을 눈물을 머금고 들려주었다.

1959년 3월, 평양을 떠나 멀리 북방에 대한 현지지도길에 회령지구도 돌아보신 주석님께서는 그날 저녁 역구내에 세운 렬차숙소에서 늦게까지 집무를 보시였다.

그러시다가 문득 소풍을 하시려고 밖으로 나오시여 뭇별들이 총총하고 고요가 흐르는 하늘가를 오래도록 바라보시며 《김정숙동무가 고향 고향 하던 회령에서 이렇게 하루밤을 보내는구만. …》하고 교시하시고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시였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문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주석님께서 친히 지으신 노래였다. 녀사에게 직접 배워주신 노래였다. 하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시는 주석님의 눈앞에 저 멀리 빨찌산시절의 녀사께서 다가오고계셨는지도 모른다.

《사령관동지, 회령은 어느쯤 됩니까?》

1936년 여름, 부대가 조국땅이 바라보인다는 백두산서남쪽되골령의 험준한 령마루에 톺아올랐을 때 녀사께서는 장군님께 이렇게 물으시였다.

《김정숙동무의 고향이 회령이라고 했지. …회령은 백두산너머 저 멀리 두만강가에 있소.》

녀사께서는 장군님께서 손들어 가리키시는쪽을 발돋움을 하며 하염없이 바라보시였다. 마치 보고 또 보느라면 고향땅이 보일것만 같으셨던지 구름이 뒤덮여 잘 보이지 않는 백두산너머를 눈길을 모아가며 그냥그냥 바라보시였다.

하지만 실은 그 고향이 녀사에게 그 어떤 애틋한 추억을 남겨드린것은 아니였다.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한스러움과 슬픔만이 남아있는 고향이였다.

그러나 정작 살길을 찾아 그곳마저도 떠나셔야 했을 때에는 너무도 슬퍼 어머님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울었다는 녀사이시였다.

얼마나 고향 회령을 그리워하고 가보고싶어하시였던 녀사이시였던가.

항일전의 나날 녀사께서는 회령이 고향인 녀대원에게 나는 회령을 떠난 후 한번도 고향생각을 잊은적이 없다, 장군님 모시고 산에서 투쟁할 때 기쁜 일이 생겨도, 슬픈 일이 생겨도 내 고향 회령을 생각하였다, 행군을 하고 전투를 할 때에는 좀 나은데 밀림속 숙영지에서 유난히 밝은 달을 바라볼 때면 고향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조약돌 하나하나가 눈앞에 삼삼하였다, 이다음 조국을 기어이 해방하고 꼭 고향에 가보자고 몇변이나 뜨겁고 절절하게 외우시였다.

고향으로 가게 될 날은 과연 언제일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또 그려보시던 고향 회령을 바로 지척에 두게 된 날이 드디여 왔다.

1945년 12월 북방의 여러곳을 찾으시며 조국인민들을 새 조국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시던 녀사께서는 부령이라는 곳에도 가신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회령은 령 하나 사이였다.

한 녀투사가 회령이 점점 가까와진다고 은근한 심정을 담아 말씀드리자 녀사의 눈가에는 절절한 그리움의 빛이 한껏 어리였다.

만강의 개울가에서 한 녀대원과 함께 장군님으로부터 《사향가》를 배울 때에도 마음속으로 그 얼마나 간절히 그려보시던 고향이였던가.

그래서 빨찌산시절 녀사께서 부르시는 《사향가》의 노래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며 절절히 울리군 하였다.

그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강하시였던지 1983년 10월 31일 자정무렵, 주석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오늘 저녁에는 어쩐지 김정숙동무에 대한 생각이 자꾸 난다고 하시더니 우리 함께 정숙동무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르자고 하시면서 《사향가》의 선창을 떼시였다.

노래를 부르신 뒤 주석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국제련합군의 많은 간부들이 우리 사령부에 자주 찾아와 식사를 하군 하였는데 한번은 그들이 김정숙동무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니 그가 《사향가》를 불렀는데 얼마나 눈물겹게 잘 불렀던지 노래의 세계에 매혹된 쏘련군 장령들은 어린 김정일동지를 덥석 안아 높이 추켜올리며 《옳다. 왜놈들을 때려부시고 백두산이 있는 조국으로 빨리 가자.》라고 하면서 방안을 빙빙 돌았다. …

그렇게도 그리시던 조국이고 고향이였다.

하지만 그날 녀사께서는 자신의 고향방문을 예견하여 소박한 기념품까지 준비해가지고 떠났던 녀투사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못하시였다.

…동무들의 마음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나라가 해방되였어도 아직 우리 인민의 생활이 어렵고 할 일이 많은데 어찌 고향부터 찾겠습니까.

위대한 장군님의 새 조국건설로선을 높이 받들고 공장복구에 떨쳐나선 로동자동무들부터 만나봅시다. …

그날 오후 고무산세멘트공장을 향해 또다시 길을 이으시다가 녀투사들이 도중의 멀지 않은 곳에 회령이 있다고 말씀올렸을 때에도 녀사께서는 잠시 길가에 내려서시여 무산령 너머 회령쪽을 한동한 바라보시다가 웃으시며 《회령에는 이다음 꽃들이 활짝 필 때 가보자요.》라고 하시며 갈길을 재촉하시였다.

사실 녀사에게 있어서 고향길은 뿔뿔이 흩어진 혈육들의 생사라도 혹 알아볼수 있는, 마음속아픔을 조금이라도 가실수 있는 길이였다.

조카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글썽해지군 하시던 녀사이시였다.

불의에 달려든 《토벌대》놈들에 의해 숨을 거두시며 어머님이 녀사께 부탁하고 가신 조카애였다.

《정숙아, …네 형님이 불에 타죽으면서두… 네 이름을 부르더라. …조카애 버리지 말구 길러달라구. …》

이집저집 동냥젖을 먹이며 키우던 조카, 어떤 날에는 한모금의 젖도 얻어먹이지 못해 울다울다 기진해진 조카가 잠결에 자신을 손으로 더듬을 때면 어머니, 이런 땐 난 어쩌라요 하며 소리내여 우셨다는 녀사.

녀사와 조카와의 리별은 만사람의 눈물을 샘솟게 하는 그런 순간이였다.

녀사께서 유격구로 들어가실 때 지하공작임무를 받고 어느 광산으로 가게 되여있던 오빠되시는분은 녀동생의 품에서 조카애를 억지로 앗아냈다.

유격구로 그애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녀사의 결심을 오빠가 종시 허락치 않았던것이다.

하여 녀사께서는 출발을 하루 미루기까지 하시였다. 온밤 사랑하는 조카애를 쓰다듬으시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였다.

다음날 새벽 《토벌대》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치자 녀사께서는 조카애를 안고 산으로 오르시였다. 그길로 유격구로 들어갈 작정이였다.

그런데 오빠가 달려와 혁명할 각오가 덜되였다고 녀사를 몹시 나무람하시였다.

혁명에 나섰으면 먼저 혁명부터 생각해야지 자기 집 식구나 생각해서야 어떻게 혁명을 하겠는가고, 조카애걱정은 말라고 하면서.

그리고는 우는 애를 안고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품에서 떨어진듯 조카애는 녀사를 향해 두팔을 벌리면서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이 조카애와의 영원한 리별로 될줄 어이 알았으랴.

그래서 해방후 어느날 연변지방에서 군중공작을 했다는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신 녀사께서는 혹시 우리 오빠나 삼촌, 조카소식 들은게 없느냐고 절절한 음성으로 묻기도 하시였고 내무국 보안간부학교에서 한 일군을 만나시였을 때에는 《나에게도 어린 조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놈들의 <간도토벌>때 헤여진 후 소식도 모르고있습니다. 그애가 살아있다면 지금쯤은 동무처럼 장군님을 모시고 일을 잘하겠는데…》라고 말끝을 흐리기도 하시였다.

중국에서 살던 한 항일혁명투사의 동생이 형을 찾아왔을 때 녀사께서는 혼자말씀처럼 우리 형제들도 저렇게 살아는 있겠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제발로 찾아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뇌이기도 하시였다.

어느날 녀투사들이 해방도 되였는데 헤여졌던 친척들을 찾아보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거듭 말씀을 올렸을 때 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닙니다. …

저라고 어찌 친척친우들을 찾고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

그러나 장군님께서 건국사업에 바삐 보내시는데 제가 어찌 집을 떠나겠습니까. 일제놈들은 쫒겨났으나 그대신 남조선에 미국놈들이 둥지를 틀고있습니다. …

제가 장군님의 사업을 도와드리지 않고 어찌 자리를 뜨겠습니까! 저는 나라가 안정되기 전에는 친척들을 찾아 떠나지 않겠습니다.》

만경대와 칠골에서 살고있던 주석님의 친척분들도 녀사께 이젠 고향에 다녀오라고 여러번 권고를 드리였고 투사들도 정 못 떠나겠으면 신문에 광고라도 내자고 간청하였다.

그런 때에도 녀사께서는 장군님께서 건국사업에 분망하신데 내가 어떻게 친척을 찾겠다고 자리를 뜨겠는가, 나라가 안정되기전에는 친척들을 찾아 떠나지 않겠다, 나에게는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장군님을 보위할 하나의 임무만이 있을뿐이다, 그리고 《정로》(《로동신문》의 전신)는 당보인데 어찌 사사로운 문제를 거기에 내겠는가고 하시고는 멀리 북쪽하늘가를 점도록 바라보군 하시였다.

서거하시기 얼마전에도 자제분들에게 너희들은 외가친척들을 찾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앞으로는 찾게 되겠지라고 외우시면서도 끝내 생전에 그토록 가고싶어하시던 고향길을 다녀오지 못하신 녀사이시였다.

그것이 너무도 한스러워 녀사와 영결식을 한 후 한 녀투사는 자기의 아픈 마음을 이렇게 터놓았다.

《너무도 아깝고 너무도 애석하다. 장례식엔 그이의 본가친척이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슴 더욱 찢어지는듯 아프다. …》

녀사와 영결하신 후 주석님께서도 마음속아픔을 누르지 못하시였다.

《김정숙동무는 해방은 되였으나 나라의 정세가 복잡한데 어떻게 한시인들 자리를 뜨겠는가고 하면서 생전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가보지 못하고 일가친척을 찾는것도 미루어온 충실한 혁명동지입니다.》

아마도 이런 사연들을 더듬어보시는지 회령역구내에서 부르시는 주석님의 《사향가》노래소리는 점점 갈리였다. …

이야기를 하는 강사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하여 자주 끊어겼고 나의 마음도 눈물에 푹 젖어있었다.

조국에 개선하신 후부터 계산해보아도 녀사께서 맞고보내신 달은 46개월, 날자수로 세여보면 1 390여일, 시간으로 계산하면 33 500여시간.

그 시간중에 고향에 한번 다녀오실 시간이 녀사께서는 그렇게도 없으셨던가.

시간!

문학가는 금싸래기, 철학가는 진리의 어머니, 군사가는 승리라고 부르고 교육자에게는 지식으로, 의학자에게는 생명으로, 기업가에게는 곧 돈으로 느껴진다는 시간.

녀사에게 있어서 그 시간은 정녕 무엇이였던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녀사의 시간은 다름아닌 주석님을 받드는 마음, 조국과 혁명, 인민을 위한 마음이라고.

세월은 흘러 1991년 8월, 회령은 드디여 위대한 주석님을 녀사의 고향집에 모시는 행운을 받아안았다.

해방직후 이제 나라일이 펴이면 온 가족이 함께 와보자고 벼르고벼르시던 회령고향집에 혼자 오시게 된 주석님의 눈가에는 이름할수 없는 감회가 비껴있었다.

그날 주석님께서는 군복차림으로 밝게 웃으시는 녀사의 동상앞에서 일군들과 함께 사진도 찍으시였다. …

TV에서 수없이 보아온 기록영화의 화면이 내 눈앞에 흘러갔다.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일군들앞에서 《사향가》를 부르시던 주석님의 그 모습이.

고령이신데도 가사 하나, 음정 하나 틀리는데 없이 그토록 유정히 부르시던 《사향가》의 노래소리.

노래를 부르시는 주석님의 눈앞에 어찌 만경대의 고향집과 소나무 우거진 만경봉의 풍치, 아름다운 대동강의 모습만이 어려오셨다 하랴.

《사향가》를 부르시며 고향을 그렇게도 그리시던 김정숙녀사의 모습, 백살구꽃 활짝 핀 회령의 고향집에서 환희 웃고 계시는 녀사의 모습도 주석님의 눈앞에는 뜨겁게 어려오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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