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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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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7(2018)년 10월 1일 [련재]

 

2. 그 무엇도 대신 못한다

 

비결

 

1961년 10월 중순, 김일성주석님께서 조선로동당대표단을 인솔하시고 이전 쏘련을 방문하시였을 때의 일이다.

주석님께서는 당시 국제녀성리사회에 참가했다가 귀국하는 조국의 녀성대표단일행을 친히 만나주시였다.

그들을 위해 오찬까지 마련하신 주석님께서는 동무들이 이번에 조선음식생각이 났을것이라고 다정하게 물으시며 조국에서 가지고 오신 마늘, 고추장, 김치 등을 권하시였다.

잠시후 접대원이 감자료리를 들여왔는데 주석님께서는 뜻밖에도 그것을 감자를 즐겨하는 다른 동무들에게 권하라고 이르시였다.

녀성대표들이 의아해하자 주석님께서는 감자음식을 이윽토록 내려다보시다가 이런 내용의 교시를 하시였다.

내 이제부터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합시다.

항일무장투쟁의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한달동안이나 계속하여 감자를 날것으로 먹은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적들의 추격이 심하므로 불을 놓을수 없었소. …나중에는 감자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소. 눈을 꽁꽁 빚어먹으면 오히려 더 시원하더구만. 그래도 우리는 싸우기 위하여 감자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한알씩 먹었습니다.

주석님께서 이렇게 교시하시면서 녀성대표들에게 음식을 권하시였지만 그들은 눈물이 글썽하여 수저를 들념을 못했다. 그분께서 겪으신 천만고생이 가슴을 아프게 허비였기때문이였다.

주석님의 교시는 계속되였다.

그때는 앞으로 왜놈들을 때려부시고 조국에 돌아가면 감자를 심는 사람은 법에 의하여 처벌해야 하겠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량강도에서 감자를 왕이라고 하였소.

이렇게 이야기를 마감하시면서 주석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러나 녀성대표들이나 오찬에 참가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웃지 못하였다. 오히려 얼굴을 싸쥐고 울거나 머리를 숙이고 가까스로 감정을 억제하고있었다.…

새기면 새길수록 목이 꽉 메여오는 이야기여서 그 사실을 듣는 나의 가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날감자만 드시던 일이 얼마나 지겨우셨으면 주석님께서 그런 교시를 다하시였으랴.

그 오찬에 동석하였던 한 녀투사는 후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 그때 김정숙동지께서 곁에 계셨다면 무슨 방법이든 생각해냈을거요. 정숙동지는 삶은 감자만 계속 먹으면 새난다고 하면서 그 어려운 속에서도 감자를 갈아서 지짐도 지져주고 농마떡도 만들어주군 했으니까. 변변한 화식도구도 없는 산에서 감자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든다는것이 참말 헐한 일은 아니였소. 지금도 식탁에 갖가지 맛있는 감자음식이 오를 때면 언 날감자로 끼니를 에우시던 우리 수령님생각,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생각이 자꾸 난다오.》

주석님께서는 녀사의 지성에 대하여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나는 감자떡을 보면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에 있은 일이 생각납니다. 어느해인가 우리는 두달나마 낟알구경을 못하고 감자와 풀뿌리로 끼니를 에운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령부작식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김정숙동무는 나에게 매끼 통감자를 삶아주기가 딱하였던지 이따금 감자를 갈아 지짐도 지져주고 떡도 해주었습니다. 그 감자지짐과 떡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말 김정숙동무는 그처럼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나에게 온갖 지성을 다하였습니다.

언제인가는 이런 추억의 교시도 하시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취가 단음식이 아니지. 하지만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 맛을 잊을수 없소.… 내가 취나물쌈을 즐겨하기때문에 정숙동무는 행군도중에도 취나물만 보이면 배낭속에 뜯어넣었다가 식사때 내놓군 하였소. 어느해 겨울에 정숙동무가 생눈을 파헤치고 뜯어온 취나물로 쌈을 싸먹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소. 그때 나는 밥맛을 잃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대원들과 함께 행군하고있었소. 그러던 어느날 숙영지에서 숙영을 하게 되였는데 나의 밥그릇에 취나물 몇잎이 올라있었소. 우리 동무들에게 겨울철에 취나물이 어디서 났는가고 물어보았더니 정숙동무가 얻어온것이라고 하였소. 정숙동무는 부대가 숙영준비를 하는 사이에 혼자몸으로 손발이 얼어드는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생눈을 헤치고 뜯어왔던것이요. 나는 그 취나물쌈을 먹고 밥맛을 회복했소.

그런 때가 한두번이였던가.

1940년 10월 하순경의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그때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한 소부대는 연길현 사방대의 수림을 지나 왕청현의 백초구와 하마탕, 대황구일대의 넓은 지역을 류동하면서 군사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며칠동안 집요하게 뒤따르는 적들을 령활무쌍한 전술로 감쪽같이 떼버리고 소부대에 휴식명령을 내리시였다.

그런데 소부대에는 밥을 지을 가마가 없었다. 지고 다니던 가마가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총탄에 맞아 못쓰게 되였기때문이였다.

대원들의 식사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던 녀사의 심정은 몹시도 안타까우시였다.

이때 한 대원이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얼마 안되는 닦은 강냉이로라도 요기를 해야 할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녀사께서는 간고한 행군에 지쳐 쓰러져있는 대원들을 바라보시다가 어떻게 식량이 있는 조건에서 닦은 강냉이로 요기를 하라고 하겠는가고 하시면서 천천히 샘터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말없이 뒤따르던 대원이 난감해하며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손맥을 놓고있을 때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던 녀사께서는 그에게 《꼬치떡》을 만들어보자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배낭에서 꺼낸 비옷을 물에 깨끗이 씻으시고 거기에다 밀가루반죽을 하여 《꼬치떡》을 빚으시였다.

그것을 싸리가지에 꿰여 모닥불에 먹음직하게 구워내실때에야 대원은 탄성을 올렸다.

녀사께서 노랗게 구워낸 《꼬치떡》을 먼저 장군님께 올리자 그분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그 사연을 알아보시고는 어서 대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이르시였다.

가마가 못쓰게 되여 식사를 할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던 대원들은 《꼬치떡》을 보고 환성을 올리며 달게 먹었다. 누구나 녀사의 지성이 어린 음식이여서 더 맛있다고, 아마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을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이제는 반세기도 퍽 이전의 이야기들이였다.

하지만 그 나날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도 나의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고있으며 오늘도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고있다.

해방후 어느날 녀사께서는 점심참이 훨씬 지났는데도 자주 부엌을 나드시며 두부찌개를 데우고 또 데우시였다. 그러다나니 나중에는 다 졸아들고말았다.

녀사께서는 두부찌개를 새로 또 준비하시였다.

오후 5시가 다 되여서야 댁으로 들어오신 주석님께 곧 더운 식사를 드리시며 녀사께서는 식찬이 변변치 못하다고 송구해하시였다.

그러자 주석님께서는 자애깊은 음성으로 지금 이보다 더 좋은게 어디에 있겠는가고, 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산나물과 풀뿌리로 끼니를 에워오지 않았는가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추억깊은 어조로 교시하시였다.

《나는 정숙동무가 만들어주는것은 무엇이나 다 맛이 있구만.

식찬이라야 김치, 콩나물, 두부찌개와 같은 수수한 음식들이 놓인 식탁을 마주하시고도 무엇이나 다 맛있다고 하신 주석님의 그 교시가 어찌 어려웠던 과거에 대비하여서만 하신 교시였겠는가.

1949년 4월 27일 공화국의 첫 보건상의 안해가 녀사께 지금도 주석님의 식사를 도맡아하시는것 같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었다. 산에서 그만큼 고생하셨는데 이제는 부엌일쯤은 남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그때 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장군님을 모시기 전에도 맡아보던 일이였는데 장군님을 모신 후부터는 언제나 제가 손수 만들어 올리는것이 응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늘 사업이 바쁘시고 자주 출장을 다니시고 회의도 늦게까지 하시므로 도무지 때식을 제대로 지키실수가 없으시여 삼시 따끈히 대접해드리는 일도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음식을 가리시지도 않으시고 별로 귀한 음식을 올리는것도 없고 그저 무엇이든 따뜻한 진지를 드실수 있도록 하여드릴뿐입니다. …》

녀사의 그런 모습은 어리신 김정일장군님께도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겨드렸다.

1964년 6월 18일 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런 교시를 하시였다.

《지금도 내가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어느날 밤 아무리 기다려도 수령님께서 돌아오시지 않기때문에 부관장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이제 곧 들어가실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님은 그때부터 다시 불을 때면서 밥과 국을 덥히시였는데 수령님께서는 좀처럼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님께서는 불이 꺼질만 하면 또 불을 때군 하시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들어오시는 수령님께 인차 더운 음식을 드리시였습니다.

언젠가 내가 본 우리 조선민족의 풍속을 소개한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 음식의 진미는 먹는 음식의 온도와 먹는 공간의 온도 그리고 먹는 사람의 체온이 같을 때 우러나는데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이 밥이나 국, 찌개, 숭늉을 구들온도와 같이 부뚜막에 덥혀 새끼손가락으로 뜨겁지 않게 느껴질 때 적당한 온도로 여긴것은 먹는 사람, 먹는 공간, 먹는 음식의 이 3위 1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것으로 리해될수 있다. …》

주석님께서 항상 따뜻한 진지를 드실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지성을 다하신 녀사.

그 모습에는 어떻게 하면 주석님께서 수수한 음식이라도 더 맛있게 드시도록 할수 있겠는가고 늘 마음쓰신 녀사의 진정이 뜨겁게 어려있었다.

해마다 손수 메주를 쑤어 장을 담그시는것을 보고 누군가가 왜 힘들게 그러시는가, 사다가 잡수시면 편할텐데라고 했을 때 장군님께선 집에서 내 손으로 담근 장을 더 좋아하셔요, 내가 좀 노력하면 장군님께 기쁨을 드릴수 있는데 힘이 들게 뭐예요라고 말씀하셨다는 녀사.

녀사께서 서거하신 후 장물이 넘쳐나는 독을 보시며 주석님께서는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정숙동무는 산에서 투쟁할 때에도 내가 장을 좋아한다고 늘 마련해가지고 다녔소. 해방이 되자 매해 장을 담그군 했는데 정숙동무 손으로 담근 장은 특별히 맛이 있었소.

녀사께서는 김장을 담그셔도 통김치, 깍두기, 개성보쌈김치 등 갖가지 종류로 해넣군 하셨다고 한다.

예로부터 훌륭한 주부가 되려면 12가지 김치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각 지방 토배기녀인들이 울고 갈 정도로 그 맛이 기막혔다는 녀사의 김장솜씨는 결코 한 가정주부의 자각에서만 나온것이 아니였다.

수시로 찾아오는 각이한 손님들의 식사를 저택에서 보장하시던 당시 조건에서 겨울철 손님대접에는 김치가 중요하다고 하신 주석님의 교시가 그런 뛰여난 김장솜씨를 발휘하게 한것이였다.

어느날 부관의 안해는 녀사의 일손을 도와드리다가 늘 생각해오던 점을 말씀올렸다고 한다.

《내내 산에서 총을 잡고 싸우셨다는데 장담그는 법이랑 김장하는 법은 언제 배우셨습니까?》

그러자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셨던 녀사께서는 산에서 싸울 때는 마음뿐이지 장군님께 아무것도 대접해드리지 못했어요, 지금은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것을 왜 못하겠나요, 어떤 사람들은 감이 재간이라고 하면서 감만 있으면 음식을 얼마든지 맛있게 할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정성이 재간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이렇게 뒤를 이으시였다.

《나는 감이 없는것이 걱정스러운것보다 어쩌다 순간이나마 나의 정성이 소홀해질가봐 그것이 더 걱정스러워요.》

녀사께서 만드신것이면 별치않은 음식같아도 무엇이나 다 맛이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감이 재간이 아니라 정성이 재간이다!

나는 녀사의 이 말씀이 단지 가정주부들, 녀성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사는 자기 수령을 어떤 마음으로 받들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새겨주는 간곡한 당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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