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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게시날자 : 201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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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6(2017)년 11월 9일 [기사]

고려는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있어서나 첫 통일국가의 출현은 그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며 따라서 그것을 옳게 해명하는것은 민족사발전의 합법칙성을 뚜렷이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된다.

그러나 지난 시기 우리 나라의 력사학계에서는 《신라통일론》과 같은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옳게 밝혀내지 못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김일성종합대학에 령도의 자욱을 옮기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오래동안 흑막속에 가리워져있던 《신라통일론》의 부당성을 낱낱이 까밝히시고 그에 토대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새롭게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삼국시기에 고조되였던 통일지향이 그후 누구에 의해 어떻게 계승되였는가 하는것을 밝히는데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는것을 포착하시고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나갈 명확한 진로를 열어놓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49(1960)년 10월 29일 론문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할데 대하여》를 발표하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운데서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온 나라는 고구려였다고 교시하시였다.

삼국시기로 말하면 통일지향이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통일국가형성문제가 일정에 올랐던 시기였다.

고구려는 력사발전의 이러한 요구에 맞게 오래전부터 삼국의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주변나라들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과 밀접히 결합하여 힘있게 밀고나갔다.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고구려의 투쟁은 서북방정세가 비교적 안정상태에 들어간 4세기 후반기이후에 본격화되였으며 5세기말~6세기 초중엽경에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당시 고구려는 온 겨레와 강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국토통일위업을 계속 밀고나갔다.

만약 그 무렵에 외세와 야합한 신라통치배들의 배신행위가 없었더라면 고구려는 삼국의 통일을 완성하고 우리 나라를 하나의 강력한 통일국가로 전변시켰을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삼국시기에 통일국가형성을 위한 투쟁에서 논 고구려의 주도적역할에 대해 밝혀주시였을뿐아니라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통일지향이 고려로 이어져 결실을 맺게 된 사실에 대해 새롭게 밝혀주시였다.

고려는 대동강이남의 후백제와 신라는 물론 그 이북에 있는 고구려의 옛 령토와 발해주민전부를 포괄하는 강대한 통일국가를 일떠세울것을 지향하였다.

고려의 26대왕이였던 충선왕이 자기의 선대왕들에 대해 회고하면서 그들이 남방의 정세가 복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경(평양)과 북쪽변두리를 자주 순찰하였는데 그 뜻은 동명의 옛땅(고구려의 옛땅)을 휩쓸어 차지하려는데 있었다. 그들의 원래 포부는 결코 남쪽의 신라땅이나 차지하고 북쪽으로 압록강까지나 나가려는것이 아니였다고 한 말은 그 뚜렷한 증시로 된다.

고려사람들의 이러한 지향은 고구려사람들의 삼국통일정책을 새로운 력사적조건에 맞게 계승한것이였다.

그러나 종래에 사람들은 흔히 고려를 후기신라의 북쪽땅에서 일어난 신라의 《후신국》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다나니 누구도 고려가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이어받은 사실에 주목을 돌리지 못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계승한 고려에 의해 국토의 통일이 어떻게 실현되였는가를 뚜렷이 하시기 위하여 이른바 고려《재통일론》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진행하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49(1960)년 12월 20일 조선력사학습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놓고 학생들과 담화를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는 주장이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는다는것을 강조한바 있습니다.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는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것이라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한 고려에 의한 국토의 재통일이라는 주장도 검토해보아야 할것입니다.》

종래에도 사람들은 고려시기에 이룩된 통일에 대하여 많이 강조해왔다. 그러나 1950년대말까지만 하여도 그것은 《신라통일론》을 전제로 하여 그 테두리안에서 론의되여왔다. 신라에 의해 《통일》되였던 삼국 즉 《통일신라》가 그 말기에 태봉국(고려)과 후백제, 신라 등 《후삼국》으로 갈라지게 되였는데 이《후삼국》을 다시 통일한것이 고려였다는것이였다.

《신라통일론》을 전제로 한 이러한 고려《재통일론》 역시 근본적으로 잘못된 주장이였다.

비범한 예지와 통찰력으로 고려《재통일론》의 정체를 꿰뚫어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려에 의한 통일을 신라가 차지했던 대동강이남지역의 재통일과정으로 리해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였으며 그 다음날인 12월 21일에 또다시 고려사람들이 자기들의 통일지향과 념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건국초기부터 남과 북 두 전선에서 완강한 투쟁을 벌리였다고 강조하시였다.

그이의 이 가르치심들에는 고려에 의한 통일과정을 대동강이남의 후백제와 신라에 대한 통합과정에 국한시켜 보아서는 안되며 발해유민포섭과 고구려의 옛땅통합을 위한 북방진출을 통일정책실현의 다른 한 고리로 인정하고 문제를 폭넓게 고찰하여야 한다는 사상이 집약되여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에 의한 통일과정, 고려통일국가출현과정에 대한 리해에서는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되였으며 마침내 국토의 통일을 이룩한 첫 통일국가가 고려였다는것이 과학적으로 론증정립되게 되였다.

 

김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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