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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날자 :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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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9월 3일 [소개]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일본의 소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발전된 문화는 일찍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주변나라들의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방일각에 찬연한 빛을 뿌려온 우리 민족의 문화는 일찍부터 일본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실로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석기문화로부터 금속문화에로의 이행을 인도해주고 일본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것도 우리 민족이였으며 미개하던 일본사람들속에 국가문명의 싹을 틔워준것도 바로 우리 조선민족이였다.

참으로 일본력사의 갈피갈피에는 우리 민족의 체취가 깊이 슴배여있다.

우리 나라의 재능있는 철학가, 소설가, 시인이였던 김시습(호는 매월당, 1435‐1493)의 단편소설집 《금오신화》가 에도시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조선민족이 일본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기로 하자.

에도(오늘의 도꾜)에 막부를 두고있던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전 령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1603년부터 명치《유신》이전 1867년까지를 포괄하는 에도시대는 우리 나라를 문명국으로 숭상하고 조선의 문화를 따라배우려는 열의가 그 어느 시기보다 높았던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집권한 도꾸가와막부(일명 에도막부)는 철저한 쇄국정치를 실시하였지만 오직 조선에 대해서만은 문호를 개방해놓았다.

이 정책의 리면에는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선행자들이 조선침략전쟁(임진왜란)을 일으킨데 대한 사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중요하게는 조선의 발전된 문화를 수입하여 자국의 문화를 한계단 높은 수준에로 끌어올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것은 1604년부터 재개된 우리 나라와의 사신외교를 놓고 보면 잘 알수 있다.

당시 막부와 번(이 시기 일본의 지방통치기구)의 통치자들은 우리 나라의 사신단이 올적마다 학자들을 기본으로 하여 영접단을 구성하였는데 일본의 학자들은 그 대렬에 들어가는것을 일생일대의 행운으로 여겼으며 추천된 날에는 명절기분에 들떠있었다고 한다. 한것은 그것이 조선의 사상과 문화, 풍습을 가까이에서 접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때문이였다.

조선에 대한 숭배심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어떤 학자는 아사꾸사(도꾜의 동쪽지방)로부터 시나가와(도꾜의 서쪽지방)로 이사를 하고는 문명국인 조선과 한걸음 더 가까와졌다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김시습의 단편소설집 《금오신화》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다.

다 아는바와 같이 김시습은 세조(수양대군)의 패륜적인 왕위찬탈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벼슬을 단념하고 일생을 방랑생활로 보냈으며 그 과정에 봉건통치배들의 폭정으로부터 초래된 불합리한 사회현상, 가난과 고통속에서도 이지러지지 않는 인민들의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목격할수 있었다. 1460년대 중엽 경주 금오산에 들어간 그는 지난 기간의 체험에 기초하여 끓어오르는 창작의욕을 불태우며 《금오신화》를 일필휘지로 집필하였다.

《금오신화》는 다양한 주제와 째인 구성, 능란한 문장구사와 여기에 작가의 특이한 인생행로와 결곡한 성정까지 반영되여있어 잡으면 놓고싶지 않고 한번 읽으면 또 읽고싶어지는 작품이다.

《금오신화》는 우리 나라뿐아니라 바다건너 일본에서도 수많은 독자들을 쟁취하였다.

에도시대에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진 《금오신화》는 승응2년(1653), 만치3년(1660), 관문13년(1673)에 걸쳐 출판되였다. 하나의 작품이 20년어간에 재판에 재판이 거듭되였다는 사실은 《금오신화》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게 한다.

특히 주목되는것은 관문13년판 《금오신화》이다. 이것은 하야시 라장(1583‐1657)이라는 학자가 구두점을 찍고 주석을 단것이였다.

당시 문학계에서는 고전소설에 구두점을 찍는것이 해당 작품의 종자를 파악하고 그 기본내용과 주제사상을 정확히 리해하여야만 가능한 매우 어려운 문제로 공인되고있었다. 그런데 하야시 라장이 자기 나라의 소설도 아닌 조선고전소설 《금오신화》에 구두점을 찍고 주석까지 달았다는것은 그가 작품의 내용은 물론 우리 나라의 력사와 문화, 풍습에 대한 폭넓고 깊이있는 지식을 소유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하야시 라장은 에도시대의 이름난 정치가, 사상가였다. 그는 에도막부의 내정과 외교에 적지 않게 공헌하여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보다는 일본의 유교성리학의 시조였다는것으로 하여 학자로서의 명성이 더 높았다.

하야시 라장의 학문세계는 조선적성격이 짙은것으로 특징지어지는바 그는 우리 나라 최대의 성리학자 리황(호는 퇴계, 1501‐1570)의 철학을 신봉하였으며 16세기의 사상가들인 리언적, 리이, 서경덕의 저서들을 널리 탐독하였다. 지어 그는 조선성리학에 접하자 곧 일본옷을 벗어버리고 우리 나라 선비옷을 입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모든것을 따라배우려했던 라장이였기에 《금오신화》에 매혹되여 구두점을 찍고 주석을 달수 있었던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인기가 높았던 《금오신화》는 하야시 라장에 의하여 보다 강한 침투력을 가지고 일본사람들속에 광범히 읽혀졌다.

《금오신화》의 여운은 멀리 명치시대에까지 미치였다.

일본이 봉건을 《청산》하고 자본주의《문명》의 길에 들어섰다는 그때에도 《금오신화》는 또다시 출판되였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주되는것은 《금오신화》에서 받은 에도시대 사람들의 감흥이 그대로 명치시대에 이어진데 있었을것이다.

일본의 어느 이름있는 문학가는 《금오신화》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썼다.

《소재는 모두 조선의 인물과 풍속이며 문장 또한 매우 참신하다. 특히 작가의 처지와 불굴의 기상을 토로한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금오신화》는 일본문학의 발전에 지울수 없는 뚜렷한 자욱을 새겨놓았다.

일본소설의 력사를 놓고보면 에도시대는 그 전성기였다고 할수 있다.

정사체의 산문과 전, 기, 설을 비롯한 《정통파문학》에 짓눌려있던 일본의 대중문학 《가나조시》는 이 시기에 이르러 상품화페관계의 발전에 따라 영향력이 확대된 《쬬닝》(상인)계층의 요구를 반영하여 그 지위가 전례없이 높아지게 되였다.

당시 《가나조시》에서 이채를 띠는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데만 그쳤던 이전의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방식에서 대담하게 리탈하여 그것을 환상적인것과 자유롭게 결합시켜 이야기를 꾸민것과 묘사가 보다 세련되고 풍부화된것이다. 이것은 《가나조시》가 비로소 소설의 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소설분야에서 이렇게 괄목할만한 성과가 마련되게 된것은 아사이 료이의 《또기보꼬》가 논 큰 역할과도 관련된다.

1666년에 출판된 《또기보꼬》(혹은 《오또기보꼬》)는 아사이 료이(?‐1691)가 우리 나라와 중국의 우수한 소설작품 60여편을 선택하고 번역하여 묶은 단편소설집이다. 비록 번역작품집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아사이 료이의 의도적인 허구적창작수법이 적용되여 직역체가 위주였던 종전의 번역작품들과는 다른 특색을 보여주고있다. 이런것으로 하여 일본문학사에서는 《또기보꼬》를 창작적허구가 활용된 소설작품의 시조로 내세우고있으며 《또기보꼬》의 직접적인 영향밑에 《우끼요조시》를 비롯한 다음세대 소설들이 출현할수 있었다.

《또기보꼬》의 문학사적지위는 《금오신화》를 떠나 생각할수 없다.

《또기보꼬》에는 《금오신화》의 여러 작품들이 수록되여있는데 특히 《룡궁의 상량잔치》가 그 첫순서에 놓여있는것이 주의를 끈다.

60여편의 작품들속에서 유독 《금오신화》의 작품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호감을 품고있었으며 보다 중요하게는 《룡궁의 상량잔치》를 《또기보꼬》의 본보기로 내세웠다는것이다. 뿐만아니라 《리생의 사랑》도 《노래로 연분을 맺다》로 제목을 바꾸어 기재함으로써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렇듯 《금오신화》는 《또기보꼬》창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나아가서 일본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이상의 단적인 사실자료 하나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문화가 일본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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