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날자 : 2019-02-25

주체108(2019) 년 2월 25일 《련재》

 

7. 가장 큰 공적

 

《나의 어머니》

 

 

조국땅의 9월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9월은 김정숙녀사에 대한 련련한 추억의 달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떠나간분에 대한 그리움은 흔히 떠나간 그날이 오면 더욱 강렬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리 다채로와도 그속에 잃어버린 친어머니를 대신할수 있는 존재는 없다.

1964년 9월 어느날 위대하신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고향에 다녀오라고 권하시다가 추억깊은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시며 부모에 대한 자식의 그리움과 생각은 나이들고 철이 들수록 더욱 절절해지는것 같소, 이것도 하나의 인륜이라고 할가 특히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못견디게 가슴을 더더욱 파고드는 법이요라고 교시하시였다.

일상생활의 보편적리치를 담았다기보다도 자신의 깊은 체험의 토로가 깊이 슴배인 가르치심으로 내 가슴에 새겨졌다.

그것을 나는 위대한 장군님과 고급중학교를 함께 다닌 한 일군의 회상담으로부터 펼쳐보이려고 한다.

졸업을 한해 앞두었던 1959년 9월말의 어느날 저녁이였다.

한 학생은 학교강당에서 울리는 피아노소리에 이끌려 한걸음한걸음 그리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깊은 사색에 잠겨 피아노를 타고계시였다.

그는 처음 듣는 선률인지라 그분께 무슨 노래인가고 물음을 드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무슨 노래라 할가? … 그저 요즘 새 노래선률이 떠올라 피아노를 한번 쳐보았을뿐이야.》라고 하시였다.

그후 장군님께서는 하루수업이 끝나면 교실의 창가에 홀로 서시여 노을비낀 하늘가를 바라보시면서, 때로는 락엽지는 학교정원을 거니시면서 조용히 그 노래를 불러보군 하시였다.

몇달이 지나 12월 23일 밤이였다.

귀에 익은 부드럽고 은은한 피아노소리가 그를 또다시 학교강당으로 이끌었다.

석달전인 9월의 그날 저녁 장군님께서 타보시던 선률이였다.

그런데 무슨 노래인지 궁금해하는 그에게 장군님께서는 이날도 그저 아직 노래가 완성되지 않았다고만 하실뿐이였다.

잠시후 집으로 돌아가는데 햇솜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장군님께서는 그 소담한 눈송이들을 받아보시며 《지금 백두산에는 흰눈이 수북이 쌓였겠지. …》라고 조용히 뇌이시더니 이렇게 교시를 이으시였다.

《우리 어머님은 백두산에서 이 눈을 맞으시며 나를 안아 키우시느라고 무척 고생을 하셨다. 해방후 어느해 눈내리던 겨울날 밤에 어머님은 나에게 꿰진 바지를 곱게 기워 입혀주시면서 이제 대학에 갈 때면 좋은 바지를 해주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어서빨리 커서 유치원을 마치고 소학교, 중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되여 마음껏 배워서 아버지장군님을 받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시절에 나는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시며 나를 품에 안아 키워주시던 어머님의 그 사랑이 무엇이였는가를 미처 몰랐지만 크면서야 그것을 알게 되였다. 여느때도 그러하지만 더우기 오늘처럼 눈내리는 겨울날 밤이면 나는 어머님의 사랑을 돌이켜보며 어머님께서 바라시던대로 수령님을 높이 받들어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지군 한다. 방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피아노를 쳐본거다.》

그는 그때에야 지금껏 장군님께서 녀사에 대한 노래를 짓고계셨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니 해마다 9월의 그날이 오면 장군님께서는 녀사에 대한 생각으로 얼마나 절절한 그리움을 느끼셨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느라니 그에게는 장군님께서 녀사에 대한 그 노래를 처음으로 타보신 석달전의 그날도 녀사께서 서거하신지 10돐이 갓 지난 때라는 생각이 펀뜻 들었다.

1952년 12월의 어느날에 있었던 일도 떠올랐다.

교원이 본의아니게 장군님께 아픈 추억을 또다시 떠올렸던 그날의 그때를.

그날 교원은 학생들에게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지을데 대한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장군님께 있어서 지난 세해동안 고이고고여온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의 용암을 한껏 터뜨리는 분화구로 되였다.

《어머니,

이렇게 써놓고보니 돌아가신 어머님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집니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커갈수록 우리 어머님은 이 세상에서 정말 위대하고 훌륭한 어머님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님은 진정 한평생을 아버지장군님을 충성으로 받들어모시고 혁명과 동지들, 인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우신 강의한 조선의 어머니, 참다운 훌륭한 혁명가였습니다. 나도 어서 커서 어머님처럼 아버지장군님을 받들어 힘껏 일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님께서 못다 이루신 념원을 이 강산에 활짝 꽃피우겠습니다.

아, 어머니, 나의 어머니!》

이제 겨우 10대의 초어구에 들어서신 장군님이시였지만 가실길 없는 그 크나큰 슬픔을 이렇게 녀사의 념원을 기어이 실현해갈 억센 의지로 바꾸어내시였던것이다.

그때 그 작문을 본 교원의 눈가에서 줄줄이 흘러내렸을 눈물이 나의 눈에서도 흘러내렸다. …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그밤으로부터 반년 남짓이 흘러간 1960년 7월 15일, 뜻깊은 고급중학교 졸업식날 장군님께서는 만장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며 드디여 사연깊은 그 노래를 부르시였다.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시였다.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시며

나를 품어 키우신 나의 어머니

만가지 소원을 헤아려보시며

조선의 고운 꿈 꽃피워주셨네

 

비와도 눈와도 먼길 떠나도

손잡아 이끄신 나의 어머니

순간을 살아도 빛나게 살라고

길러준 그 품을 내 어이 잊으랴

 

그 시각 장군님의 눈앞에는 백두의 설한풍속에서 자신의 군복자락으로 품어안아 키우시며, 천고의 수림속에서 첫걸음을 떼여주시며 장차 이 나라를 떠메고나갈 기둥이 되여주기를 간절히 바라신 녀사의 모습이 떠오르셨을것이다.

그 시각 그분의 마음속에서는 해방후 공장과 농촌, 학교와 마을, 인민군부대들 그 어디에도 자신과 함께 가시며 백두에서 개척된 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어가기를 바라신 녀사의 당부가 또다시 새겨지셨을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나의 어머니》를 부르시는 장군님의 눈가에는 끝없이 깊고 뜨거운 감회가 흘러넘쳤으리라.

장군님께서는 솟구치는 그리움과 굳은 맹세를 담아 더욱 절절하게 노래를 이어가시였다.

 

기쁘나 힘드나 부르고싶은

정답고 미더운 나의 어머니

그 은혜 못 잊어 세월의 끝까지

수령님 받들어 한길을 가리라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뜨거운 그 사랑 내 크며 알았네

 

오늘 조국인민들만이 아닌 세계 진보적인민들모두의 가슴속에 녀사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뜨거운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나의 어머니》는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그것은 단지 아들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한편의 노래가 아니였다.

김일성주석님의 전사로서의 본분을 대를 이어 꿋꿋이 다해갈것이라는 백두산아들의 엄숙한 선언이였다.

또한 녀사를 영원히 높이 모시려는 온 겨레의 마음이 반영된 숭엄한 송가였다.

녀사의 절절한 소원과 기대를 언제나 가슴에 새기고 높이 받들어 세월의 끝까지 주석님을 받들며 한길을 가리라는 장군님의 음성은 졸업식참가자들모두의 심장에 커다란 격정을 안겨주었다.

또 한해가 흘러 1961년 9월 22일 깊은 밤 아직도 쉬지 않으시는가고 말씀드리는 한 일군에게 장군님께서는 오늘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때로부터 12돐이 되는 날이라고, 그래서인지 어머님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사진들을 찾아보았다고 하시며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이 사진이 나의 어머님사진입니다. 어머님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너무도 일찌기 우리의 곁을 떠나시였습니다.

어머님은 나를 무척 사랑해주시였습니다. 어머님의 사랑을 받은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머님의 그 사랑이 못견디게 그리워지군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수령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하여 언제나 마음을 쓰시면서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으시고 다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는 어머님의 사업에서는 언제나 자그마한 빈틈도 없으시였습니다. 어머님의 뜻을 이어 내가 수령님을 잘 모셔야 하겠는데 마음뿐이지 나에게는 빈틈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자료들을 통하여 나는 확신할수 있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녀사에 대한 추억은 절절한 그리움과 함께 숭엄한 자각과 불타는 맹세의 추억이였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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