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날자 : 2021-05-02

주체110(2021)년 5월 2일 《상식》

 

조선봉건왕조의 최고중앙관청 의정부

 

의정부는 조선봉건왕조의 성립직후인 1400년에 봉건국가의 최고중앙관청으로 설치되여 1907년까지 500여년간 유지운영되였다.

조선봉건왕조에서 고려시기와 다른 새로운 최고중앙관청 의정부를 설치한것은 이 시기에 들어와 봉건국왕의 전제권이 보다 강화된데 그 원인이 있었다.

의정부는 대신권력을 축소하고 국왕의 전제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관청이였다.

조선봉건왕조에서는 초기에 고려의 유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리하여 성립직후에는 도평의사사가 봉건국가의 최고중앙관청으로 운영되였다.

원래 도평의사사는 1279년 3월에 종래의 도병마사를 개칭하여 나온 비상설적인 합의기관이였으나 14세기초부터 상설화과정과 행정기구화과정을 거쳐 1389년 12월에 이르러 명실공히 봉건국가의 상설적인 최고중앙관청으로 변화된것이였다.

도평의사사는 합좌모임의 형식으로 운영되는 관청이였는데 그의 관직체계에는 문하부(첨의부), 삼사, 중추원(밀직사)의 2품이상 관리들이 망라되였다.

고려시기 이 세 관청의 2품이상 관리들로는 오직 재추세력만이 임명될수가 있었다. 결국 도평의사사는 재추세력으로 자기의 관직을 구성하고 재추세력의 집단적리해관계를 대변하는 관청으로 운영되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고려시기 뿌리깊이 내려온 재추정치의 온상이였다.

조선봉건왕조 성립초기에는 이렇게 방대한 권한을 행사하며 재추세력의 본거지로 되여있던 도평의사사가 봉건국가의 최고중앙관청으로 유지운영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정권운영에서 강력한 전제권행사를 지향하던 조선봉건왕조 초기의 국왕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이로부터 조선봉건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저들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도평의사사와 그를 통한 대신세력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신들의 권한이 매우 컸던 사정은 대신들이 집단적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최고중앙관청인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점차적인 방법으로 축소하지 않을수 없게끔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의 첫 국왕 태조는 그자신이 도평의사사의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새 왕조의 국왕으로 즉위한것과 관련하여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 왕조의 건국에 《공헌》한 개국공신들을 도평의사사에 인입하고 그들에 의거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방향에서 정권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도평의사사가 왕권과 긴밀히 밀착된 공신집단으로 꾸려졌다고 할지라도 국가정권운영에서 핵으로 되는 국정의정권과 군사통수권, 간쟁의 기능과 왕명출납의 기능을 모두 행사하면서 저들의 집단적리익을 대변하여 나오는 도평의사사의 대신세력은 국왕의 전제권강화에 큰 장애가 아닐수 없었다.

국왕세력과 대신세력간의 알륵으로 마침내 1398년 8월에 《왕자의 란》이 일어났으며 바로 이 《왕자의 란》을 계기로 도평의사사의 권한축소를 위한 최고중앙관청개정이 단행되였다. 《왕자의 란》은 외형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들간의 싸움으로 나타났으나 본질에 있어서는 대신정치를 주장하는 대신세력과 왕권중심의 왕실세력간의 치렬한 대결이였으며 이 대결에서 대신중심의 정치리상을 실현하려고 꾀하던 대신세력은 타도되고 정권은 리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리방원에게 장악되게 되였다.

그러나 일부 대신세력이 숙청되였다고 하더라도 대신들에 의한 왕권의 위협은 대신들이 웅거해있는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기초우에서만 비로소 가셔질수 있었다.

이로부터 리방원은 도평의사사를 개편하는 방식으로 그의 권한을 분리축소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1400년 4월 사병제도를 철페하고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대를 삼군부에 넘기였으며 당시까지 최고군사통수권을 행사하던 중추원을 삼 군부에 포섭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함께 중추원에서 왕명출납의 기능을 분리하여 새로 국왕직속의 관청으로서 승정원을 설치함으로써 국 왕의 전제권을 보다 강화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도평의사사의 명칭을 의정부로 개칭하고 중추원의 기능을 포섭한 최고군사통솔기관인 삼군부의 관리들이 의정부의 정사토의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마침내 최고중앙관청에서 국정과 군정을 분리시켜놓았다.

도평의사사의 의정부에로의 개편은 단순한 명칭상의 개정만이 아니였으며 국왕의 전제권강화에서 하나의 큰 전진이였다.

그러나 의정부설치 당시에는 삼군부의 관리들이 의정부합좌모임에서 제외되기는 하였지만 문하부와 삼사의 관리들은 의정부의 합좌모임에 의연 참가하였으며 따라서 의정부와 그의 대신들은 아직도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고있었다.

이로부터 리방원은 집권하자마자 문하부를 의정부에 통합하고 중요재정관계문제를 담당하던 삼사를 사평부로 개편한 다음 사평부의 관리들이 의정부의 정사토의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문하부의 의정부에로의 통합도 도평의사사의 의정부에로의 개편과 마찬가지로 두 관청의 기능을 완전히 합치시킨것은 아니였다.

문하부가 의정부에로 통합될 때 문하부의 중요관청권능이였던 간쟁의 기능을 분리하여 국왕직속의 관청 사간원을 설치함으로써 국왕의 전제권을 강화하고 최고중앙관청 의정부에서 국왕의 잘못을 시비하지 못하게끔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재정문제를 담당하던 삼사도 사평부로 개편되여 의정부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감으로써 의정부에서는 중요재정문제에 대한 토의 및 행정집행의 기능도 분리되였다.

새로운 최고중앙관청으로 등장한 의정부에서는 종래의 도평의사사때 하나의 관청에서 행사되던 군사통솔과 왕명출납, 간쟁과 재정문제토의 등의 기능이 분리되게 되였으며 따라서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의정부는 고려시기의 도평의사사에 비해볼 때 현저하게 축소된 권한만을 행사하는 최고중앙관청으로 운영되였다.

의정부가 설치된것은 국왕의 전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선봉건왕조 초기 국왕들의 의식적인 노력과 관제개편에 따른것이였으며 동시에 봉건적중앙집권제와 국왕의 전제권이 비상히 강화된 15세기 조선봉건왕조의 정치적, 경제적, 력사적 제조건으로부터 온 필연적인 귀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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