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날자 : 2020-03-28

주체109(2020) 년 3월 28일 《상식》

 

《김옥균살해사건》

 

명성황후일당이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묵인, 비호밑에 1884년 부르죠아개혁운동의 지도자였던 김옥균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1884년 부르죠아개혁운동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수구파》의 테로가 있으리라고 예견하고 일본정부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겉으로는 《동정》과 《우려》를 표하면서 김옥균을 《수구파》정권에 넘겨주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명성황후일당이 파견한 자객들에 의하여 살해당하게 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로부터 일본반동정부는 김옥균을 넘겨달라는 조선봉건정부의 요구에 대해 《김씨일파를 인도할수는 없으나 자객을 보내여 조치하는 일은 묵인한다.》고 하면서 김옥균을 테로의 방법으로 죽여도 좋다는것을 암시해주었다.

일본반동정부의 비호를 받은 명성황후일당의 테로분자들은 1885년부터 1886년 5월사이에 일본땅을 싸다니며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미쳐날뛰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반동들이 《수구파》와 한짝이 되여 김옥균을 살해하려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인민들의 격분을 자아냈다.

이렇게 되자 교활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김옥균이 다른 나라에 가서 살해당하도록 하는 책동을 벌리였다. 이로부터 일본반동정부는 김옥균에게 15일이내로 일본을 떠날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술책을 바꾸어 요꼬하마의 프랑스조계지에 피신해있던 김옥균을 끌어내여 태평양상의 외로운 섬인 오가사와라섬에 류배보냈다. 이와 관련하여 국내외에서 항의가 높아지자 일본반동정부는 그를 북해도의 삿뽀로에 끌어다 연금시켜놓았다가 1890년에 《석방》시켰다.

일본반동정부는 《수구파》테로분자들에게 김옥균을 살해할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수구파》가 파견한 홍종우는 1891년 3월 23일 일본외사경찰당국의 비호밑에 김옥균을 유인하여 일본배에 태우고 고베항을 떠나 상해로 끌고가서 3월 28일 상해의 일본려관에서 그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이와 같이 김옥균살해사건의 진범인은 다름아닌 일본군국주의자들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김옥균살해의 진범인으로서의 정체를 가리우기 위하여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김옥균이 벌린 부르죠아개혁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떠벌이던 일본재야세력의 두목이였던 후꾸자와는 홍종우가 일본에 기여들어와 김옥균을 유인하여 상해로 끌고갈 때 간접적으로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정체를 가리우기 위하여 교활한 《연극》을 놀았다. 이자는 김옥균이 일본 고베항을 떠나자 《김옥균은 일본에 머물러있어야 할것이였다.》고 하면서 홍종우에 의한 김옥균의 죽음이 일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인상을 주려고 오그랑수를 썼다.

한편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오또리 게이스께는 김옥균이 상해에서 살해당한후 명성황후일당이 그의 시체를 양화진에 가져다 재륙형(시체를 놓고 다시 죽이는 극형)에 처할 때 이른바 《제지》연극을 놀았으며 지어는 한성(서울)주재 각국 외교단의 명의로 이에 《항의》를 하는 《소동》까지 벌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옥균살해사건의 진범인으로서의 저들의 죄과를 가리우기 위한 하나의 자작극에 불과한것이였다.

이 시기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청일전쟁을 앞두고 《김옥균살해사건》을 반청선전에 리용하였다. 김옥균의 시체가 봉건청나라군함에 의하여 제물포에 운반되자 일본의 어용출판물들은 청나라가 김옥균의 살해를 묵인하였기때문에 《김씨피살참극》이 발생하였다느니, 청나라가 김옥균의 시체를 《수구파》에게 넘겨준것은 재륙을 원하기때문이라느니 하면서 김옥균살해책임에서 벗어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이러한 반청선전을 벌림으로써 국내에서 전쟁열을 고취하며 일본인민들속에 복수주의와 민족배타주의를 고취하려고 책동하였던것이다. 이렇듯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김옥균살해사건의 조종자로서, 진범인으로서의 정체를 가리우기 위하여 교활하고 음흉하게 책동하였다.

 



Facebook Twitter LinkedIn Google Reddit Pinterest KakaoTalk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