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날자 : 2020-03-26

주체109(2020) 년 3월 26일 《상식》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안중근렬사

 

안중근(1879. 9. 21-1910. 3. 26.)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반일애국렬사이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강하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조국의 력사를 깊이 연구하고 선조들의 애국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격술을 꾸준히 련마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군사학을 연구하고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무기도 구입하였으며 지방소년들로 《향군회》를 조직하고 군사훈련도 은밀히 하여 왔다.

1905년 중국 상해에 가서 동료들을 규합하여 애국활동을 벌리다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일시 귀국하였으며 1906년 삼화부(평안남도 룡강군)에 이사하여 삼흥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부터 애국문화운동단체인 《서우학회》 회원이 된 다음 삼화지회를 내오고 활동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이 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해에 일제가 《정미7조약》을 날조하고 조선군대까지 강제해산시킨데 격분한 그는 룡강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하려다가 탄로되여 1907년 말 로씨야의 연해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동료들을 규합하여 《단지동맹》을 뭇고 망명자들로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여 참모총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부대와 함께 1909년 6월 은덕에 진격하여 일제침략군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의병대는 그후 회령에서의 일제침략군과의 격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타승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는 조선침략에 앞장 선 일본의 고위급반동정치가들을 처단할것을 결심하고 첫번째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하리라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개인테로의 길로 나가게 되였다.

이무렵 그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대중공보사》에서 독립운동자 리강, 우덕순 등과 손을 잡았으며 그후 류동하, 조도선과도 알게 되여 뜻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해 10월 이또가 로씨야재무대신 꼬꼬흐체브와 만주침략문제를 둘러싸고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온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이또를 처단할 결심밑에 면밀한 계획을 짰다.

조도선, 우덕순이 책임진 조가 채가구역에서 이또를 처단할 계획이 실패하자 혼자서 할빈을 담당한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단의 준비를 갖춘후 일제와 로씨야군경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환영》군중속에 끼여 홈으로 나갔다.

아침 9시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자에게 조선민족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총탄을 안기여 사살하였고 그자를 구원하려고 모여온 일제의 가와시마령사, 모리서기관, 다나까만철리사장을 차례로 쏘았다.

그리고 쓰러진 원쑤들앞에서 통쾌하게 《조선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

애국렬사 안중근의 거사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의 의로운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의거에 대하여 찬탄하여마지 않았으며 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운동을 적극 벌리였다.

일제군경에게 체포되여 려순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일제교형리들로부터 악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민족적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일제침략자들은 1910년 2월 14일 형식적인 재판놀음을 벌려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3월에는 그를 교수형에 처하여 학살하였다.

안중근은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애국의 민족적지조를 지켰으며 옥중에서 조국산천이 귀중하다는 뜻을 표명하여 《제일강산》이란 글을 썼고 일제침략자들을 동양평화의 교란자로 저주규탄하는 《동양평화론》이라는 긴 글을 지었다.

안중근은 희생적으로 투쟁하였으나 탁월한 지도자의 지도를 받을수 없었던 시대적제약성으로 하여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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