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날자 : 2015-11-30

주체104(2015) 년 11월 30일 《방문기》

 

어머니들의 모습에 비낀 북녘의 사회상(1)

 -재카나다동포 리미애가 쓴 글-

 

비행기에서 내리는 첫 순간 마중나온 안내선생의 인사말이 참 인상적이였다.

《뜻깊은 어머니날에 조국을 방문하신 선생님을 축하합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고국의 체취와 정든 동포들이 그리울 때면 느닷없이 찾군하는 이북이지만 어머니날에 평양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어머니!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러만 봐도, 그 모습을 언뜻 떠올려보기만 해도 따스한 해살과도 같은 포근함이 온몸에 감겨든다. 그 포근함은 바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고 정이며 헌신이다. 진정 어머니의 락은 자식을 위해 끝없이 바치는데 있다. 그 어느 어머니도 자식을 위해 바친 모든것을 희생으로 생각지 않는다.

일본의 한 시인이 쓴 시가 나의 뇌리를 치였다.

 

내 어릴적 나의 어머니

나를 업고 무거웁다 하시더니

내 다 자라 어머니를 등에 업으니

너무도 가벼워 걸음을 못 떼겠네

 

한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의 가벼운 무게에 마음이 무거워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자식의 심정을 대변한 이 한편의 시에서 어제날 우리의 어머니들을 그려보았다.

세상에 태여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어머니를 가지고있다. 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있다.

하건만 인류문명을 자랑하는 현 시대에 부모가 자식을 부담스러워하고 자식이 부모를 배척하는 눈물겨운 실상을 일상적으로 목격하지 않을수 없는 내 자신이 한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보고싶었다.

이북에서는, 여기 북녘조국땅에서는 어머니들이 어떤 삶을 누리고있는가, 어머니날에 비낀 고국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것인가.

 

행복한 어머니들

 

《행복한가구요? 어머니로 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녀성도 있습니까? 더우기 세쌍둥이의 어머니가 되였는데…》

평양산원에서 455번째의 세쌍둥이를 낳았다는 한 녀성의 말이였다.

너무도 순박하고 너무도 소박하고 스스럼없는 대답이여서 질문을 제기한 나자신이 어리둥절하였다.

서방세계에서는 《녀성으로 태여나지 말라, 설혹 하느님의 벌을 받아 녀성으로 태여났다면 어머니로 되는 실수마저 범하지 말라.》라는 말이 공용어처럼 떠돌고있다.

우연한 소리가 아니다.

글을 쓰는 나자신도 얼굴이 뜨겁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를 학대하고 버리는것은 물론이고 죽이는것조차 례사로운 일로 되고있다.

비근한 실례이지만 미국에서는 아이를 버리는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여있으며 어머니들이 거리낌없이 자식을 버리고있다.

버리는것도 모자라 살인까지 식은죽먹기로 하고있는것이 현 실태이다.

얼마전 미국에서는 한 녀성이 낳은지 석달밖에 안된 젖먹이 어린것을 제손으로 죽여버린 범죄행위가 폭로되였다. 조사과정에 그가 13개월동안 자식모두를 제손으로 질식시켜 죽인 사실을 밝혀냈다.

어머니가 2살 난 딸을 살해하고도 한달동안이나 그것을 숨기고 먹자판을 벌려놓은 사실도 있다.

부모에 의한 자식살해가 비일비재로 일어나고있는 미국땅에서 이제 더는 이러한 사건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빨아들이는 특종뉴스》로 되지 못하고있다.

현실이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미국의 한 출판물이 《미국인들은 결혼과 아이문제를 별개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부모로서 아이를 낳아키우는 책임을 휴지통에 내던져버렸다.》라고 개탄하였겠는가.

심지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리유를 밝힌 책까지 출판되여 녀성들의 대인기를 끌고있는 정도이니 서방에서 녀성들의 어머니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수 있는것이다.

배척당하고있는 녀성의 존엄과 권리, 이 속에서 모성의 권리에 대해 생각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아직까지 《모든 형태의 녀성차별청산에 관한 협약》이 비준되지 않고있으며 유일한 녀성지원프로그람인 산전산후휴가제도도 명색뿐이고 빈허울만 남아있다. 녀성천시풍조는 자본주의사회의 고질적인 악페로 남아있으며 그속에서 모성의 의무와 권리를 다한다는것은 신기루에 불과한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리앙은 어머니에게 매를 맞고 거리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두고 《너는 어머니한테서 매를 맞을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아이이냐.》라고 하며 어머니정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머니와 자식간에는 인위적으로 갈라놓을수 없는 사랑만이 있을뿐이라는것을 강조한 플로리앙이 아마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현 시대에 이와 같은 현실을 목격했다면 《네가 이 세상에 태여난것이 잘못이다.》라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을것이다.

내가 사업차로 자주 다니는 이남에서도 녀성들이 어머니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온갖 타락과 절망속에 앞날을 비관하고있는 현상은 보편적인것으로 되고있다.

결혼과 해산을 기피하는 《독신문화》, 법적혼인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활난으로 인하여 자식과 가정을 포기하고 갈라져산다는 《무늬만 가족》, 《솔로족》, 《홀로서기족》, 의식적으로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딩크족》 등 별의별 해괴한 《문화》와 《족》들이 산생되고있는것이 이남의 현실이다.

돈과 권력이 밀착되여 수백명의 나어린 학생들을 한날한시에 바다에 빠뜨려 죽게 만들고도 자그마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세상에서 자식가진 이남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눈물은 계속 흐르고있다.

언제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세모녀자살사건과 관련하여 이남의 한 잡지에 실린 글이 생각난다. 《〈너희들을 이 세상에 맡길순 없었어.〉, 그것은 어미로서의 마지막선택이였다. 이 사회에서 자신이 아이들에게 더 줄수 있는것은 더이상 없다는 생각으로 하여 세자식과 어머니가 아빠트 아스팔트에 선홍색 피를 뿌렸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살기 싫다. 죽고싶다.〉, 이것이 바로 이 저주로운 사회에 남긴 한많은 어머니의 항거의 웨침이였다.》

세쌍둥이를 안고 행복의 웃음을 짓는 이북의 어머니와 자식을 낳는것을 부담으로, 우환거리로, 재난으로 생각하고 저주로운 세상과 단호히 결별한 이남의 어머니, 얼마나 대조적인가.

다같이 세자식을 둔 어머니였다.

하건만 이남의 어머니는 행복이라는 물음에 죽음으로 대답했고 이북의 세쌍둥이어머니는 물음 그 자체를 반문했다.

평양의 여러곳을 돌아보면서 나는 왜 그 녀성이 나의 물음을 반문했는가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되였다.

특히 평양산원과 옥류아동병원, 경상유치원을 돌아본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보석주단우에 펼쳐진 아기들의 행복의 요람과 그속에서 울려나오는 고고성, 치료와 교육이 다같이 보장되는 최신식설비들이 갖추어진 병원을 초월한 아이들의 궁전, 기초교육은 물론 재능의 싹을 찾아 배움의 나래를 활짝 펼쳐주는 어린이들의 활무대…

더우기 경이로운것은 이 모든 교육과 보건혜택들이 다 무료라는것이였다.

태여난 첫날부터 교문을 나설 때까지 국가적부담과 사회적우대속에 자식들을 키우는 이북의 녀성들은 정말로 행복하였다.

예로부터 자식하나 키우는데 오만자루의 품이 든다고 하였다. 하건만 이북에서는 이 오만자루의 품을 다 국가에서 부담하고있으니 자식을 낳은 녀성이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하는데 도대체 얼마만한 품을 들이겠는지 의문될 정도였다.

서방에서는 한자식을 낳아도 두려움과 걱정속에 한숨부터 내쉬건만 이북에서는 세쌍둥이를 낳았다고 금반지와 은장도를 선물로 주고 온갖 특전특혜를 다 베풀고있으니 이런 행복을 받아안은 녀성을 두고 행복한가고 물음을 제기한 나자신이 정말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북녀성들은 복속에 사는 녀성들이였다.

 

 

 

 



Facebook Twitter LinkedIn Google Reddit Pinterest KakaoTalk Naver